인파서블 여행기 #70 [파키스탄/훈자] 기분 좋은 훈자
이글네스트에서의 하룻밤.
모처럼 풍경 좋은 곳에 왔는데 시간을 헛되이 보내기가 아쉬워 새벽 일출을 보겠다고 알람을 맞춰놓은터라,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옛날에 여행 할 때는 일출 보겠다고 참 열심히도 일어나고 그랬는데, 일출 본다고 일어난게 언젠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시간을 보니 새벽 4시. 일어나자마자 방안의 차가운 공기가 온 몸을 감싼다. 이 쌀쌀함이 참 견디기 힘들면서도 좋다. 아슬아슬한 기분의 경계선. 이불에서 일어나긴 싫지만 정신이 번뜩 드는 이 새벽의 서늘함이 좋다.
밖은 여전히 어둡다. 해가 언제 뜰지 모르지만 어제 일하는 직원에게 대충 물어본바 4시30~5시 정도 사이에 뜬다는 말에 일단 준비는 해본다. 바깥은 더욱 춥기 때문에 꽁꽁싸매고 밖으로 나왔다. 정신이 번쩍 드는 차가운 공기. 숨을 들이마셔 보니 너무나 상쾌하다. 이런데서 살면 장수를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다. 훈자가 장수 마을로 유명한 이유가 다 있는 것 같다.
어둠을 뚫고 우린 천천히 걸어 어제 일몰을 보로 올랐던 이글네스트 언덕으로 향했다. 어둡기 때문에 렌턴으로 불을 비추며 올라 가는데 조금씩 저 멀리 하늘이 어슴프레 해졌다. 푸른 빛이 도는 먼 하늘.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시간이 아닌가. 어둠에 잠들어있던 세상의 모든 것들이 깨어나는 시간. 난 유독 이 시간의 저 파란 하늘이 보면 옛날에 봤던 한 영화가 떠오른다. 장국영이 나오던 영화였는데 제목은 기억이 안나지만, 여자와 빌딩 옥상에서 밤새도록 꼭 부등켜안고 해가 뜨길 기다리는데, 저 멀리 하늘이 푸르스름 해질 때의 그 슬픔과 아련함이 유독 기억에 남아서인가 그 영화 이후는 동이 터오는 하늘을 보면 유독 생각이 많이 난다.
어두운 이글네스트에 다 오르자. 검은 어둠 속에는 아무도 없다. 게다가 정상은 바람을 막아 줄 곳도 없어서 더욱 추웠는데 쌀쌀한 기온에 강풍까지. 정말 오들오들 떨릴 정도로 추웠다. 그래도 멋진 풍경을 멋지게 보고자, 전망좋은 큰 바위에 올라가 걸터 앉았는데 정말 너무 추웠다. 칼바람이 쌩쌩. 그 곳에 앉아서 해가 뜨길 기다려보나,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다. 도무지 그 칼바람을 맞으며 바위 위에 올라 앉아 있기가 힘들어 바위 아래로 내려와 바위밑에 숨었다. 칼바람을 피하는 것만으로 몸이 훈훈해지는 기분이다. 그 곳에서 일출을 기다리니 파키 사람들도 몇몇 올라온다.
먼 하늘은 푸르게 밝아오고 점점 세상이 밝아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8천미터 대의 고봉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나타나는 그 설산들의 절경. 할 말을 잃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자연의 장엄함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 같다. 이제 해가 뜨기 일보직전이라,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멋진 그림이 나오는 곳을 찾았다. 그리고 해가 떠오른다. 일출이 시작 되었다.
하지만 구름이 너무 많이 껴서 정작 일출의 묘미인 해는 잘 안보인다. 간밤에 비가 내려 더욱 그랬나보다. 구름만 없으면 얼마나 환상적일지 상상조차 안된다. 일출만 놓고보면 구름 때문에 다 망한 일출이지만 배경이 워낙 엄청난 풍경을 자랑하다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상적이었다. 한참 서서 밝아오는 일출을 봤다. 그리고 오랜만에 본 일출의 의미를 더 하고자, 근처에 돌탑에 탑을 쌓고 기도를 했다. 사람이란 참 모두 바라는 것이 비슷한가보다. 어느 나라에 가든 돌탑은 이렇게 항상 보인다. 절경에 올라,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은 다 똑같은가 보다. 일출을 잘 보고 다시 숙소로 와서 나는 쉬면서 여행 내내 완전 꽂힌 팟캐스트 이이제이 듣고 쏘세지는 한숨자고.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체크아웃을 해야 되는 12시 즈음해서, 우리는 체크아웃을 하고, 아침밥도, 점심밥도 모두 거른채로 길을 나섰다. 원래의 계획이라면 이 곳에서 울타르 메도우로 가는 트래킹 코스를 걸어야 했으나 길이 막혔다 하니 별 수가 없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리고 울타르 메도우는 따로 트래킹을 해야 할 것 같다. 어느새 한 낮의 태양이 기분 좋게 빛을 비추는 듀이가르 마을을 걸었다. 조용한 마을. 밭들이 보이고, 추수가 끝난 농토가 보이지만 정작 사람의 소리나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기분 좋게 길을 걷는데, 집 한채 한채, 정갈하게 가꾼 밭의 모습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 나즈막한 시골 담 위에 훈자의 명물, 살구를 말려서 널어놓고있다. 살구는 싱싱할 때도 달콤하지만 이렇게 햇볕에 말리고 나면 그 달콤함은 배가 된다. 잠시 서서 말린 살구를 보다가 하나를 집어 먹었다. 기분 좋은 단맛이 난다. 정말 이 곳은 그 자체로 천국이다. 발걸음 한걸음 한걸음이 기분 좋다. 내리막길의 연속인 길들이라 기분 좋게 듀이가르 마을을 걷는데 어제 차로 올라 올 때는 제대로 못즐겼던 듀이가르 마을의 풍경은 참 멋진 시골길 그 자체였다.
내려가면서 여길 걸어서 올려면 얼마나 빡세겼냐는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다가 태국 이야기가 나왔다. 쏘세지는 부모님이 태국에 오는 문제 때문에 태국에 대해 이 것 저 것 묻는데, 내가 태국가면 이 것도 있고, 이 것도 먹을 수 있고, 태국 얘기를 하는데, 정말 얘기하면서 생각해보니 태국은 천국처럼 느껴졌다. 태국의 맛있는 음식 설명과 재밌는 놀거리 설명에 쏘세지 얼굴에 함박웃음이 진다. 얼른 빨리 태국이 가고 싶어졌다고. 활짝 웃는 쏘세지.
즐거운 이야기 하면서 천천히 우린 걸어 내려갔다. 중간 중간 과일이 탐스럽게 열린 나무들이 있었는데 쏘세지가 이 걸 그냥 둘리가 없다. 사과를 딸려고 바둥바둥 하고, 다른 열매들도 따려고 아둥바둥 하는데, 지나가던 한 할매가 계속 파키스탄 말로 중얼 거리며 과일 따는 것을 도와준다. 무뚝뚝한 느낌이 들지만 마음씨 따뜻한 할매는 외국놈들이 뭘 그리 힘들게 먹겠다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도 과일을 따서 우리에게 건네 준다. 이게 진짜 여행의 묘미다.
언제부턴가 공정여행 이란 낯간지러운 말로 배낭여행을 포장해대지만, 항상 배낭여행자들은 그러해왔다. 공정여행 이전에 사람과 교감을 나누는 배낭여행, 여행 중 언제나 미소가 지어지게 만드는 건 사람이다. 사람이 좋다.
재미난 할매를 만난 이후에도 여전히 한가로운 시골마을의 길은 계속 되었다. 우리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꼬마 아이들이 사진 찍자고 다가오기도 하고, 집안에 앉아있던 할배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말을 건네며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기도 하고 (한국이라고 하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들며 굿 컨트리! 라고 화답을 한다 ) 즐거운 시골길.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듀이가르 마을 초입에 있는 큰 나무 근처에 왔다. 이 나무는 이 마을의 노인정 같은 역할을 한다. 노인들이 삼삼오오 그늘에 모여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고, 바로 옆으론 훈자의 계곡물이 시원하게 쏟아져 내려오고, 그 시원한 계곡물은 냉장고역할을 하듯, 근처의 슈퍼마켓에서 담가놓은 나무 상자안에 음료수등을 가득 채우고 있다.
잠시 앉아 쉬는데, 쏘세지가 항상 군것질로 먹는 과자들이 있길래, 쏘세지에게 " 과자 안먹으면 할배들한테 줘. " 그리고 과자를 주는 쏘세지 사진을 찍어줬다. 이런게 다 추억이지. 나와 함께 여행하는 이들에게 많은 추억을 주고 싶다. 그게 내 맘이다.
할배들은 왠 동양의 낯선 처자가 과자를 주자 해맑게 웃으며 과자를 입으로 가져간다. 기분 좋은 미소다. 할배들과 잠시 말도 안통하지만 바디랭기지며 영어에 파키스탄말까지 섞어서 대화를 해본다. 말이 안통해도 마음은 통한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길을 나섰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삼거리에 도착했다. 걸어 갈 까 하다가, 이 길은 스즈키(훈자의 교통수단, 일본 자동차 회사 스즈키에서 만든 작은 봉고차를 이용하기 때문에 스즈키라고 부른다 )가 돌아다니는 길이라 스즈키를 좀 기다렸다가 스즈키를 타고 숙소가 몰려있는 제로 포인트에 도착했다. 우린 아침,점심도 거르고 거의 2시간여를 걸려 걸어내려왔던 터라, 배가 엄청 고팠던 상황이라 우린 카리마바드 인에 가서 김치 볶음밥, 수제비를 시켜 먹으려고 기다렸다.
그리고 한국여자 3명 등장.
3명은 돼지엄마,깝녀,이름/특징없는여자였는데, 대화 내용이 본의 아니게 다 들려서 정말 재밌었다. 사실 그 전에 나와 쏘세지 둘이서 대화 나눌 때, 쏘세지가 그런 애길 했었다. 아무래도 여자다보니 심리파악이나 여자들 끼리 모였을 때 습성을 아는지라 쏘세지가 했던 말이. 대략 이런 식이었다. 긴 대화들과 많은 대화들에 나온 이야기라 대충 요약하면 이러하다.
쏘세지의 분석
- 돼지 엄마, 파부 아줌마 함께 파키에 왔겠지만 둘이 사이가 안좋다.
- 사이가 안좋은 이유는 돼지엄마의 까칠하고 짜증나는 성격 때문
뭐 이런거였는데 식당에서 여자 3명이서 대화하는데 진짜 돼지엄마 성격 안좋아보였다. 한 여자가 일부로 생각해서 음료수를 사와서 주는데 " 아~ 나는 콜라 아니면 안마신는데 " 이 지랄을 시전하지 않나. 암튼 웃겼다. 이런 저런 대화들이 참 ㅋㅋㅋ
쏘세지말대로 파부아줌마랑,돼지엄마랑 사이가 안좋나 보다. 어쨌든 그런 중에 맛나게 밥먹으니 진짜 시장이 반찬이라고 안그래도 맛있는 밥이 더욱 맛있었다. 밥을 기분 좋게 먹고 숙소를 향해 다시 언덕길을 오르는데 쏘세지가 식당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하면서 돼지엄마 진짜 피곤한 성격이라고, 분명 다른 두 여자도 돼지엄마 안좋아할것 같다고. 하면서 같은 여자로서 여자들 세계와 사회성에 대해 분석을 마구 시전한다. 웃긴다. 그런 대화를 나누며 우린 걸어서 천천히 숙소로 돌아왔다. 가든롯지에 도착하자 집에 돌아온 느낌. 오자마자 왈리에게 인사하고 왈리가 시트 갈아주고, 쉬면서 난 밀린 일기 쓰고 쏘세지는 낮잠을 잤다.
숙소 오기 전에 쏘세지는 네팔에서 온 한국인 선교사부부와 함께 구입했던 살구비누에 대해서 가격을 알아보는데, 쏘세지가 선교사부부를 통해 구입한 가격은 200루피. 그거 살 때, 200루피는 진짜 아닌 것 같다고, 아무리 좋은 비누라지만 파키스탄 물가가 있는데 정말 특산물이란 이유로 외국인에게 터무니 없는 가격을 받는 것 같다고해도 구입을 했는데 오는 길 그냥 아무 슈퍼 들어가서 살구비누 가격을 물어보니 그냥 처음 부른 똑같은 비누가격이 140루피다. 그럼 그렇지. 저것도 사실 비싼건데 여행 중의 쇼핑은 신중해야되는데 괜히 기분에 휩쓸려 특산물이란 말에 흡쓸려 사는 것 같다.
숙소와서 푹 쉬는동안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피곤했던지 쏘세지는 완전 잠을 푹 자고, 나도 밀린 일기며 이 것 저 것 앞으로 여행이 어떻게 될지 숙소에 있는 파키스탄 관련책을 보며 루트를 잡고 하다보니 저녁 8시. 어두워진 밖에는 도시의 밤과는 달리 어두컴컴. 뭔가를 먹긴 먹어야 겠는데 딱히 먼 밑에 카리마바드인 식당에 다시 가기도 하고 그래서 항상 지나가면서 눈여겨 보던 바로 근처의 레인보우 호텔 식당으로 갔다. 이 곳을 왔다갔다 할 때 마다, 저 곳은 어떤 곳일까 생각해봐도, 겉 외관이 너무 깔끔하고 그래서 정이 안가서 안갔는데 막상 식당안에 들어가니 제법 그럴싸한 메뉴가 있는데 우린 고심끝에 치킨 커틀릿(300루피)과 치킨볶음밥을 시켰다.
깔끔한 식당 내부는 여행자들만을 위한 식당은 아닌 듯, 현지인들도 많이 있었다. 그리고 음식이 나왔는데 비쥬얼이 제법이었다. 맛은 어떨까? 딱 먹는데, 왠일 왠일!!!!
대박 맛집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맛. 단점이라면 가격이 좀 비싸고 양이 적다는 것 그 점을 제외하고는 완전 훌륭했다. 샐러드 신선한 토마토 등도 나오는데 가격 좀만 낮추고 양 늘리면 레전드급 식당이 될 느낌이었다. 기대이상의 멋진 저녁을 한판한 우린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와 정비의 시간을 가졌다. 오늘 오후4시부터 물이 안나왔는데 다행이도 씻고 빨래하고 할거 다하면서 쉬면서 재정비. 앞으로의 루트나 일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참 가고 싶은데는 많은데 달랑 두명 밖에 없으니 섣불리 움직이기가 힘들다. 다른 한국사람들은 전부 우리가 너무나 가고 싶었던 페어리메도우나 낭가파르바트 베이스캠프 쪽으로 놀러갔는데 참 안타까웠다. 지프대여비가 정말 비싸서 인원이 모여야 갈 수 있는데 왕따 당하니 가고 싶어도 못가는 상황.
쏘세지 분석으로는 파부아줌마가 갔기 때문에 돼지엄마가 안갔을꺼라고 하는데 골 때린다. 우린 가고 싶어도 못가는데, 아무래도 페어리메도우는 포기해야 할 것 같고 아쉬운대로 울타르메도우만 가야 할 것 같다. 그나마도 가이드 고용해야되서 사람들 갈 때 갔으면 돈도 절약하고 재미나게 놀았을텐데 2명이서 가이드 고용해서 돈도 배로 들고, 힘든 산행이 될듯. 정말 참 아쉽다. 그 때 그들이 갈 때, 같이 가자고 이야기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지금의 관계는 달라졌을까 얘기하면서도, 어쨌든 대부분 다 페어리 메도우를 놀러간지라, 안보이니까 속은 편하다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곳 가든롯지에 머무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나와 쏘세지, 옆방 총각 이렇게 3명인데, 옆방총각 때문에 또 여기 식당에서 밥해먹을려고 항상 우르르 나타나 왕따를 시켜버리니 정말 속이 뒤집힐노릇. 정말 쏘세지 말대로 안보이니까 마음은 편하다. 참 아이러니 하다. 여행 중 이런 감정을 느끼긴... 그래도 더이상 악감정 안가져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오랜만에 즐거운 기분으로 훈자의 밤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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