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도전기] #2 세부, 그 첫걸음

세부 정착을 위한 준비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좋아하는 스쿠버다이빙을 지속하기 위해선 안정적인 무언가가 필요했다. 다년간 느낀 것은 진심 따윈 중요치 않다는 것.  철저하게 사업을 목표로 하려면 체계적인 그 무언가와 다른 수입원이 필요했고 더군다나 다른 곳도 아니고 필리핀의 세부라면 더욱이 그 요구가 절실했다.


나는 그렇게 '세부의 태양'이라는 이름으로 숙소, 풀빌라, 여행업과 스쿠버다이빙을 아우르는 브랜드를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드디어 필리핀으로 떠나던 그 새벽.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두근거림을 안고 새벽 5시 세부 투어를 다녀온지 며칠만에 다시 세부에 도착했다. 익숙하게 세부 공항을 빠져나오려던 나는 첫 장애물을 만났다.


바로 썩어빠진 필리핀의 부패였다. 정착을 위한 대량의 짐으로 인해 세관에서는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짐검사를 하는 곳에 삼삼오오 모여있는 게을러빠진 녀석들은 나를 주시했다. 나를 두고 뭔가를 이야기 한다. 본능적으로 내가 먹잇감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짐을 카트에 끌고 다가가자, 나를 붙잡고 한켠에 잠시 머물도록 한다.


어느새 같이 비행기를 타고 온 수 많은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나는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빨리 뭔가를 처리하라고 재촉하자 세관업무를 담당하는 녀석이 나를 다시 또 다른 곳으로 부른다. 요지는 그러했다. 다이빙 장비가 왜 이리 많고, 짐이 왜이렇게 많으냐는 얘기. 가방 하나당 세금을 물리기 시작하는데 세금으로 미화 200불 가량을 요구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내가 왜 내야 하냐고 묻자. 계속 가방의 사용 목적을 묻는다. 내 장비고 내 짐이다. 이걸로 장사하는게 아니다라고 이야기해보지만 녀석들의 목적이 진짜 세금,관세가 아니라 나에게 돈을 뜯어 내려한다는 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이 없어서 그냥 깔깔깔 배를 잡고 웃자. 다른놈이 묻는다. " 하우머치? "


- 하우머치? 이 씨발놈아 니가 그러고도 공무원이야? 니 지금 장사해?
존나 욕을 해대는 것과 상관없이 녀석은 당당하게 계속 얼마까지 낼 수 있는지를 묻는다.


- 하우머치 씨발놈아 1달러 씨발아
그러자 녀석들은 심각하게 말을 주고 받더니 나에게 회유를 한다. 적당히 얼마 정도 내면 보내주겠다. 하지만 못내겠다고 버티자 녀석들은 강경책을 쓴다. 존나 위엄있는 척한 표정으로 처음 부른 가격의 2배를 부르며 이 돈을 내던가 아니면 가방을 입수하겠다고 하는거다. 정말 썩어빠질 대로 썩은 놈들이었다.


내가 사용해야 될 다이빙 장빈데 무슨 개소리냐고 얘기하자.  장비를 압수한다고 한다. 계속 지랄하자. 감옥 가고 싶냐고 협박을 한다. 내가 보내라고 하자. 녀석들은 자기네가 나를 보내주고 싶어도 씨씨티비가 있어서 자기네 보스가 자기네를 문책할꺼라며 적당히 얼마 정도만 내라고 한다.  그리고 말도 안되는 서류를 가져다가 (읽어보지도 않음) 거짓 명목을 들이대며 관세를 요구한다.


새벽 5시, 관광객은 나 혼자 덩그러니 남은 상황. 진짜 안그래도 졸립고 피곤한 상황에서 빡이 쳐서 정말 다 불질러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앞으로 세부에 정착하게 되면 끊임없이 마주쳐야 될 필리핀의 부패였다. 앞으로 더한 상황에서도 이런 녀석들과 타협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얼마나 썩어빠져야 이럴 수 있을까. 


시간과의 싸움. 그리고 내가 승리했다.
배낭여행으로 다져진 배짱과 배째라는 정신으로 녀석들은 결국 1시간이 넘은 시간을 나를 붙잡아두고나서야 포기한다. 개새끼들.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필리핀에 정착하면서 겪게 될 부패의 시작점이었다. 


밖으로 나가자, 내가 머물 샵 '씨블'에서 일하는 한국인 매니저 "지"가 필리핀 여자친구와 마중을 나왔다.  너무 오랫동안 나오지 않은 나를 걱정했다는 지와 잠시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며 픽업 차를 기다렸다. 곧 자동차가 오고 차는 어두운 공항을 빠져나와 어두컴컴한 도로를 내달렸다.


새삼 마음이 동요한다. 앞으로 내가 정착해야 될 곳, 모든 부조리함과 마주해야 될 그 곳. 그렇게 생각하자 여느 때 배낭여행 때 같으면 두근거림 대신 짜증들과 근심들이 몰려온다. 어느새 하늘에 동이 터온다. 여행이었더라면 아름다웠을 그 붉은 하늘은 이 때 만큼은 핏빛으로 물든 암울함이었다. 


가면서 매니저 지와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저런 이야기들. 샵에 대한 이야기. 사장에 대한 이야기 등등. 

- 강사님 왜 이 샵을 컨택하셨어요? 더 좋은데 가실 수도 있었을텐데..

그 질문에 내 목적과 조건이 좋다는 대략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지는 나에게 샵이나 사장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친절하게 이 것 저 것 설명해주고 안내해주는 지가 맘에 든다.  이 곳 세부에서 오랜동안 있으면서 많은 손님을 상대하며 몸에 밴 친절과 말투.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괜찮은 사람이다. 


사장님의 성격에 대해 물었다. 내가 앞으로 한동안은 함께 해나가야 할 사람. 지는 말을 아꼈다. 하지만 그 반응에서 사장이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차는 조용한 도로를 말없이 내달렸다.  그리고 지가 말을 꺼낸다.


- 어떻게, 머무실 숙소 먼저 가시겠어요? 아니면 샵으로 가시겠어요.
아무래도 짐도 풀어놓고 앞으로 내가 살 곳을 보려면 숙소를 먼저 가는게 나을 것 같아 숙소에 먼저 가자고 이야기를 했다. 


- 시간이 시간이니까 숙소에 짐 풀고 일단 쉬실래요? 아니면..
- 아 그냥 숙소에 짐만 풀고 샵으로 갈게요


숙소에 도착했다. 나름 멋드러진 정문이 있는 빌리지였다. 이 곳에서 빌리지는 여러 집,연립주택 같은 곳들이 한 단지를 이뤄 있는 곳을 일컷는다.  그리고 낡아보이는 연립주택 같은 곳에 차가 섰다. 일단 배낭만 메고 지를 따라 앞으로 내가 머물 방으로 향했다. 


- 사장님은 여기 2층에 사시고요, 머무실 곳은 3층입니다.
- 지 매니저는 어디살아요?
- 저는 좀 독립적으로 살고 싶어서 다른 곳에 따로 나와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쁘지 않은 방이다. 오랜 배낭여행으로 별의 별 숙소에서 다 자봤기 때문에 나에겐 인도 어느 곳의 허름한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그런데 바닥이 미끄럽다 보니까 수도관이 터져서 물이 작은 주방겸 거실에 흥건하다. 


- 내일 애들 보내서 고치게 해야겠네요. 일단 방에 짐만 푸세요
방문을 열자 낡고 텅빈 방안에는 침대만 덩그러니 있다. 암울함이 전해져온다. 10년전 인도여행 첫날 델리의 허름한 숙소 방문을 열었을 때의 기분이다. 집에 가고싶다.

- 귀신이 나올 것 같이 어두컴컴한 내 숙소



하지만 곧 익숙해질 느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배낭만 한쪽 구석에 내려놓고 지 매니저를 따라 다시 밖으로 나와 차를 타고 샵으로 향했다. 샵은 큰 호텔 안에 위치해있는데 위치가 좋다. 어두운 샵 문을 열고 다이빙 장비들을 옮겼다.  지매니저가 간단하게 이런저런 안내를 해줬다.


- 저희 직원들하고 출근시간이 오전 8시니까, 전 한숨 자고 다시 이따 뵙겠습니다.
- 네 그래요 고마워요

인사를 나누고 지 매니저는 집으로 떠나고 낯선 샵에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앞으로 내가 세부의 태양을 운영하며 또 이 곳의 일을 봐주며 머물 샵.  세부의 현실에서는 괜찮은 샵이지만, 그간 태국이나 한국 등 다른 샵들과 비교하면 뭔가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이제 진짜 현실에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아침 7시가 넘어가고 몸은 피로한데 잠은 오지 않았다.  밤샘 비행기를 타고 세부공항에서 실갱이까지 겪은 터라 몸과 정신이 더 피로했다. 노트북을 펴고 쇼프로그램 하나를 틀어놓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잠시 문 밖으로 나가 호텔 안을 이리저리 두리번 하며 살펴봤다. 그리고 지루하디 지루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 혼자 우두커니 앉아서 졸립고 피곤하고 배고픈 상황에서 인천공항에서 사온 삼각김밥을 먹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하나...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 덧 아침 8시. 직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필리핀 스탭들. 이미 고지를 받은 터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한참 지나자 지 매니저도 나타났다. 사장은 나타나지 않는다.

- 사장님 어제 밤에 보홀투어 다녀오셔서 피곤하셔서 아마 늦게 나오실꺼에요
- 아 그래요?
- 식사라도 먼저 하실래요?

그렇게 지매니저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이 곳에서 식당도 함께 운영하기 때문에 식사가 제공되는데 이제 앞으로 내가 관리도 겸할 식당이다. 지매니저는 가면서 이야기를 해준다.

- 이제 진정한 갑이십니다. 
- 무슨 소리에요
- 매니저 업무 맡으시면 이제 아까본 필리핀 스탭, 여기 식당등을 모두 관리하게 되실꺼에요
- ......
- 이제 월급도 직접 챙겨주시고 일 시키시고 하실꺼기 때문에 얘네 한테는 완전 갑이에요


뭔가 내가 사장과 이야기 한 것과 조금 달랐다. 나는 약간의 독자적인 시스템으로 운영하려 했으나 내가 이 곳에 새로운 매니저가 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서 말을 아꼈고 지 매니저는 새벽에처럼 친절하게 사람들 마다 인사를 시켜주고 나에게 여러가지 정보들을 알려준다. 굳이 묻지 않은 직원들 월급까지 이야기 하며 얘는 얼마 받구요, 얘는 얼마 받구요, 등등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식이라면 내 예상보다 필리핀에 대해서 더 빠르게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히 강사의 노동력이 필요한 샵이 아니라 관리자가 필요한 샵이라면 더욱이 내 목적에 부합된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침 밥은 한국식당 답게 백반으로 나왔다.






밥이나 반찬이 제법 먹을 만 했다. 밥 먹으며 지매니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알게되었다. 지매니저가 그만둘 예정이기 때문에 그 후임자로 내가 온 것이라는 것. 나는 따로 세부의 태양을 독자적으로 운영하며 내 것만 하면 되는지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실질적으로 이 샵을 운영하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또 다르게 전개 되었다. 


- 사장님이 거의 신경안쓰기 때문에 사실상 이제 이 샵을 운영하신다고 보시면 되요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뭘 안다고, 필리핀에 대해 배우려고 왔는데 이걸 운영하라니. 뭔 이런 뜬금없는 소리가 있나 싶었다. 그리고 지매니저의 말대로 나는 새로운 매니저가 된 듯, 호텔 안의 이 곳 저 곳 직원들을 소개하며 지 매니저는 나를 " 뉴 매니저"라고 소개를 했다. 상상도 안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 매니저가 친절하게 곳곳을 안내해주고 사람들과 인사시켜주고 시스템에 대해 설명을 해주는데 귀에 잘 들어오지는 않는다. 갑자기 방대한 정보다.  그리고 다시 샵으로 돌아오자, 필리핀 직원들이 청소를 하고있다. 나에게 인사를 건네며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 눈에 보인다. 새로온 매니저는 어떤 사람일까? 탐색전을 벌인다. 지매니저의 말대로 나는 새로운 매니저로 인식된 눈치다. 아직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그들이나 나나 탐색전이 필요한듯 하다.


우두커니 샵에 있으니 지매니저는 바쁘게 업무를 보고, 어느 샌가 손님들이 나타난다. 오늘 한국으로 떠나는 손님들인듯 지매니저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손님들의 유형이 내가 전에 보지 못했던 유형들이다.  손님들을 살펴보니 이 샵의 대략적인 분위기를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자주 찾아왔던 단골인듯 필리핀 스탭들을 종 부리듯 자유자재로 부린다. 커피를 타오게 하고 후한 팁을 준다. 적응이 잘 되지 않는다.


그간 내가 만났던 이들은 팁은 없으나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이들이었다면 이 곳은 종처럼 부리나 대신 후한 팁을 주었다. 뭐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유형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앞으로 나의 손님들이 될 것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매니저가 새로온 매니저님이라며 " PADI강사님 이십니다 "라고 얘기하자 사람들이 갑자기 급 동요한다.

- 오! 패디 강사님이세요? 
그 말투와 표정등이 진짜 제대로 된 강사를 봤다는 듯한 인상이었다. 필리핀에서 패디 이미지가 이 정도란 말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다른 샵이 얼마나 개판이길래 패디강사라는 말에 엄청난 호기심과 호의를 보이는 것일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게 모두가 패디였던 태국과는 또 달랐다. 패디강사라는 말한마디에 사람들 눈빛이 바뀌는게 느껴진다. 신기한 반응이다.  손님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어느새 정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여전히 사장은 나타나지 않는다. 뭐하는 사람일까. 새로온 사람이 있다면 이쯤 출근해서 봐야되지 않을까. 마냥 사장을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진다. 


앉아서 오늘 해야 될 일들을 정리해봤다. 앞으로 필리핀에서 사용할 유심도 만들고 이것저것 한국에서 준비하지 못한 생필품등을 좀 사놔야 한다.  게다가 환전까지! 지매니저에게 어디서 살수 있는지 물어보고 안내 받았다. 문제는 가는 교통편인데 간단힌 팁을 준다. 필리핀 스탭에게 오토바이로 좀 데려다 달라고 하면 아마 기름값으로 얼마정도를 요구할 것이라는 것이다. 


스탭 한명에게 부탁하자. 기꺼이 간다며 준비를 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스탭이 안내하는대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가볍게 환전을 하고 인근에서 가장 큰 쇼핑몰 가이사노 그랜드몰로 향했다. 그 곳에서 유심을 사고 간단한 생필품 몇개를 구입했다. 그리고 샵으로 돌아가기 전 기름값으로 얼마를 챙겨줬다. 그리고 샵으로 돌아오자. 샵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져있는 것이 사장이 출근한 듯 했다.


몇번을 만나고자 했어도 서로 계속 엇갈려 만나지 못하고 카톡이나 전화상으로만 대화했던 그와의 첫만남. 앞으로 내가 겪어야 될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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