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도전기] #3 세부의 긴 하루, 긴 첫날
볼일을 보고 샵안으로 들어가자 사장님이 있다. 드디어 첫 만남. 안으로 들어가자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온다. 나이가 꽤 들어보이는 인상인데 키가 크고 호리호리 하다. 생각보다 키가 커서 깜짝놀랐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어색한 상황. 뭔가 얘기를 하겠거니 했는데 인사를 하고 난 뒤에는 따로 별 말이 없었다.
당연히 사람이 처음 왔으니, 앞으로 뭘 잘부탁한다던가, 무슨 얘기가 있을텐데 싶어서 잠시 한켠에 있으니, 따로 특별한 언급이나 말은 없다. 달랑 인사만 나누고 다시 한쪽 교육용 테이블에 앉아 있으니, 지매니저가 한참 분주히 왔다갔다 하다가 자기가 원래 쓰던 자리를 비우며 나에게 자리를 옮기라고 한다.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샵이 정신없이 산만한 가운데, 조금 한적해 지자, 사장님이 이야기를 한다.
- 아무리 해도 자기 샵 같진 않겠지만 자기 샵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운영해주세요
- ...........
- 딱 해줄것만 해주면 저도 큰거 안바랍니다. 그냥 이 강사님이 잘 운영해보세요
너무 파격적이다. 알아서 내 샵이라고 생각하고 운영을 해보라니, 이런 대우가 어딨는가. 어쨌든 지매니저가 쓰던 책상을 이어 받아 자리를 옮겨 앉아서 있는데 어디서부터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동안 얼마나 샵을 도맡아 운영했는지 지매니저의 책상'이었던' 자리에는 수 많은 서류들이 서류철로 정리가 되어있다.
간략하게 서류철에 대해 지매니저가 언급하고 나도 살짝 서류를 살펴보는데 이제 막 온 내가 이걸 봐도 되나 싶을 정도로 샵 운영에 필요한 전반적인 모든 것들이 다 있었다. 직원들 월급을 준 페이슬립 ( 필리핀 스탭들의 페이를 보고 깜놀했다. 이게 필리핀 현실이구나..) , 각종 영수증들. 부동산 렌트비용, 여러가지 수 많은 원가를 다 알 수 있는 영수증이었다.
그 증거를 보니, 이 모든 것들을 내가 살펴볼 수 있는걸 보니 정말 나에게 샵을 맡긴다는 말이 과언이 아닌듯 했다. 실제로 지 매니저가 그렇게 혼자 운영했던 모양이다. 대박이었다. 생각보다 내가 필리핀에 대해 더 빨리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기분이 조금은 좋아진다. 오후가 넘어가면서 피로도가 극도로 된 상황. 딱히 어떤 언질들도 없고 첫날이라고 무슨 환영식이 있나 없나 그런 얘기도 일언반구도 없는 상황
숙소로 돌아가기엔 좀 그렇고, 그렇다고 첫 날부터 샵에서 설치고 있는 것도 그래서 조용히 지켜봤다. 사장님이 앉아있는 가운데 지매니저 혼자 분주히 바쁘다. 손님들 케어하고 바쁜 와중. 정체를 알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마치 동네 복덕방 마냥 와서 죽치고 얘기하고 떠났다. 그냥 분위기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고 오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정도.
그러다보니 어느새 오후 느즈막히. 지매니저도 어디론가 손님들과 나가서 사장님이랑 뻘쭘하게 둘이 남은 상황. 밥이나 먹자고 하여 처음보는 어떤 남자와 함께 3명이서 식당으로 밥을 먹으로 갔다. 밥을 먹는데 내가 생각하는 보통의 샵들이라면 새로운 사람이 왔으니 뭔가 환영식이라도 하거나 술 한잔 할 법도 한데, 별 말 없이 저녁식사를 끝마쳤다.
사장도 딱히 말이 많은 편은 아닌것 같아 다시 가게로 돌아와 뻘쭘히 있었다. 슬슬 집에 가봐야 하는데 이거 무슨 지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난감한 상황. 그러다 사장님이 볼 일이 있다며 밖으로 나갔다. 다시 샵에 완전히 홀로 남았다. 하루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 불과 새벽 5시에 도착해서 너무나 많은 일들이 벌어진것 같다.
슥 보니, 밤에 공항으로 떠나는 손님들 캐리어가 있어서 문을 잠그고 가버리면 안될 것 같기도 하고 이에 대해 어떤 얘기도 들은 적이 없는 터라,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밤 10시. 혼자 계속 샵을 지키고 있으니, 너무 졸립다. 너무나 피곤한 상태.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지 매니저에게 연락했다.
- 혼자 지금 샵에 있는데 이따 밤에 가는 손님들 짐이 있어서 그런데 어떻게 하죠?
그러자 지매니저가 이내 왔다. 손님들과 맛사지를 받고 있었다며 열쇠를 가지고 문을 잠궜다.
- 숙소에 혼자 가실 수 있겠어요?
- 갈 수는 있을거 같은데 아직 눈에 안익어서 제대로 지프니를 세울라나 모르겠네요
지매니저는 몸에 밴 친절로 지프니 잡는 걸 도와준다며 지프니를 잡아준다. 그리고 숙소 모습을 기억하냐며 잘 보고 세우라고 주의를 주고는 나를 지프니에 태웠다.
지프니를 예전 필리핀 여행 때 타고 첨이다. 어두컴컴한 도로, 지프니 안의 필리핀 사람들. 그리고 첨 홀로 가보는 숙소. 계속 바깥 풍경만을 주시했다. 그러면서 오늘 하루가 머릿속을 스쳤다. 도대체 뭘까.. 여긴.
첫날이라고 무슨 환영회가 있던것도 아니고 분위기를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오늘 새벽에 도착한 이래로 긴 하루. 뭔가 깝깝하고 답답한 마음이 나를 조여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덧 숙소가 나왔다. 급하게 차를 세우고 숙소로 향했다. 새벽과는 달리 밤이 되자 더욱 암울해 보이는 숙소. 홀로 계단을 올라 3층 내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깝깝하다. 허름하고 낡은 방, 진짜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지? 회의감이 밀려오고 한국으로 돌아가고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 하지만 금방 좋아질 것이라며 위안을 하며 긴 하루를 정리하며 씻고, 침대에 누웠다.
이제 첫날, 내가 예상한 세부의 분위기, 샵의 분위기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또 어느면으로는 굉장히 낯설고 막막하다. 앞으로 내가 마주쳐야 될 사람들일 것으로 예상되는 오늘 만났던 수 많은 사람들. 침대에 누워 수 없이 많이 겪었던 인생의 첫날들이 떠오른다. 훈련소의 첫날, 인도여행의 첫날, 호주에 막막했던 그 첫날들. 그리고 모두 잘 될거라며 위안을 하며 긴 하루를 마쳤다.
언젠가 세부의 태양이 아름답게 보일 그 날이 올 것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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